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 2026년 10월 1일 · 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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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의 문장이 사람의 입을 빌려 나오는 시대
스웨덴 스톡홀름의 벤처 캐피털 회사 창립 파트너인 사라 위머크란츠 씨는 최근 업무 회의를 시작하며 낯선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은 아침 회의가 아닙니다. 재설정입니다"라는 말이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입니다. 앞의 것을 부정하고 뒤의 것을 내세우는 이 화법은 인공지능(AI) 챗봇이 즐겨 쓰는 '대조 프레이밍(contrast framing)'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위머크란츠 씨는 AI가 만든 글을 너무 많이 읽다 보니 그 말투가 몸에 배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이 2026년 10월 1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특정 개인의 일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직장인들이 챗GPT(ChatGPT)나 클로드(Claude) 같은 생성형 AI 챗봇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면서 대화, 슬랙(Slack) 메시지, 이메일, 문자에까지 챗봇 특유의 표현이 스며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이를 'LLM화(LLM'isms)', 또 다른 쪽에서는 '클로드 말투'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LLM은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의 약어로, 챗봇을 움직이는 핵심 기술을 가리킵니다.
문화마저 바꾸는 아첨의 화법
위머크란츠 씨가 짚은 대목은 말투 이상의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어느새 상대에게 "훌륭하다", "정말 똑똑하다"는 식의 후한 칭찬을 건네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아부에 가까운 응답을 내놓곤 하는 AI의 화법과 닮았을 뿐 아니라, 조용히 경청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스웨덴의 소통 문화와도 거리가 먼 방식입니다. 기계의 습관이 한 사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대화의 예법을 흔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스타트업의 채용 책임자 윌 바넷 씨(42세)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AI가 자신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이 AI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직접 쓴 글을 AI처럼 들리지 않게 고치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는 실제로 AI를 썼을 때 거칠 작업 흐름과 똑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원시인 말투'와 '프롬프트 말투'
뉴욕의 포춘 500대 기업 AI 고문 앨리 K. 밀러 씨는 창업자들의 단체 대화방에서 '원시인 말투(cave man speak)'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는 AI에 지시를 내릴 때 단어를 최소한으로 줄여 쓰는 극도로 간결한 화법을 이르는 말입니다. 대화방 참가자들은 이 습관이 일상으로 번져 "왜 글머리 기호(bullets)가 없느냐"는 식의 말이 오간다고 공유했다고 합니다. 최신 LLM이 목표를 먼저 밝히는 지시에 잘 반응하다 보니, 팀 회의에서 동료에게도 프롬프트를 입력하듯 지시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밀러 씨는 2022년 11월 챗GPT 출시 이전에 쓰인 글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AI가 거의 쓰지 않을 법한 단어의 예로 '불협화음(Cacophony)'을 애틋하게 언급했습니다.
AI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다니엘 월코위츠 씨는 동료의 메시지가 AI의 도움으로 쓰인 것인지, 무의식적으로 AI를 닮아 쓴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다"와 같은 구문이 담긴 메시지가 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고 합니다.
벌금통 대신 화이트보드
대응책을 마련한 곳도 있습니다. AI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디판 메타 씨(33세)는 사무실에 '프롬프트 말투' 전용 벌금통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실제 벌금통 대신 화이트보드를 두고, 누군가 AI 같은 표현을 쓸 때마다 '바를 정(正)' 자 형태의 표시를 남기는 방식입니다. '진정으로(genuinely)', '하중을 견디는(load-bearing)', '결정적 증거(smoking gun)', 'X는 새로운 Y다(X is the new Y)' 같은 표현이 대상이며, 주말에 표시가 가장 많은 사람은 회식 비용을 부담합니다. 웃어넘길 수 있는 장치이지만, 말투의 변화를 스스로 점검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AI의 말투는 어디서 왔는가
워싱턴 D.C.의 비영리 단체 최고경영자(CEO) 데이비드 보히지안 씨(56세)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AI 말투의 상당 부분이 고전적 교육을 받은 비즈니스 전문가와 변호사들이 오래 써온 문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론입니다. 그는 AI 등장 이전에 경영서 500권을 읽었고, AI는 그 책들에 더해 수백 권을 더 읽은 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결론부터 먼저"를 뜻하는 'BLUF(Bottom Line Up Front)'를 예로 들었습니다. 한때 업계의 약어였던 이 말을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AI가 전문적 화법을 대중에게 익숙하게 만든 긍정적 측면이라 하겠습니다.
반면 홍보 분야에서 20년간 임원들의 상투적 표현을 덜어내는 일을 해온 안젤라 닙스 씨는 어려움이 커졌다고 토로합니다. 창업 동기를 물으면 자기 이야기 대신 3대 핵심 기둥, 시장 기회, 경쟁적 차별화 요소를 나열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모두가 세련되게 들리지만 특별히 흥미로운 사람은 없다고 평했습니다.
시니어가 새겨볼 대목
이 기사는 시니어 독자에게도 곱씹을 만한 질문을 던집니다. 말은 한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성품이 배어 나오는 그릇입니다. 같은 칭찬이라도 진심이 실려야 전해지고, 같은 조언이라도 경험이 담겨야 무게가 생깁니다. 기계가 다듬은 매끈한 문장이 편리하다 한들, 서툴러도 자기 목소리로 건네는 한마디의 온기를 대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도구를 무조건 멀리할 일은 아닙니다. 보히지안 씨의 지적처럼 AI는 유용한 표현을 널리 퍼뜨리는 순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다만 편리함에 기대어 우리의 말과 글을 통째로 맡기기 시작하면, 오랜 세월 쌓아온 화법과 예의가 서서히 닳을 수 있다는 점은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던 스웨덴식 경청이 새삼 미덕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AI를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목소리로 사람을 대하느냐입니다. 디지털 도구가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 사이의 신뢰는 자기 말에 책임을 지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시니어 세대가 살아오며 지켜온 정직하고 절제된 언어 습관이야말로, 이 변화의 시대에 오히려 귀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