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dli팟캐스트 플레이어 Webplayer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아침마다 지혜 #500] 개혁 앞의 밑작업, 리더십은 능력과 운의 합작품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 2026년 10월 6일 · 26:49

0:0026:49

Podli 앱에서 듣기 🎧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팔로우하고, 오프라인과 차 안에서 CarPlay 및 Android Auto로 듣고, 항상 멈춘 곳에서 이어 들으세요. 무료로 사용해 보세요.

새로운 최고경영자가 부임하면 흔히 '키친 싱킹(kitchen sinking)'이라는 전략을 씁니다. 전임자가 남긴 악재와 어려운 결정을 부임 초기에 한꺼번에 털어내어 이후의 부담을 덜어 두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닥칠 고통스러운 개혁에 대비해 조직의 마음가짐과 분위기를 미리 다져 두는 '피치 로링(pitch-rolling)'이 필요해집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는 10월 5일 자 렉스(Lex) 칼럼에서 이 개념을 다루며, 기업 리더들에게 능력뿐 아니라 운도 필요하다고 짚었습니다.

피치 로링은 본래 크리켓 경기에서 유래한 용어입니다. 경기에 앞서 투구가 떨어지는 구역인 피치를 롤러로 다져 경기 여건을 유리하게 만드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기업 세계로 건너와 개혁에 앞서 밑작업을 하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을 뜻하는 은어가 되었습니다. 신문은 영국의 신임 총리 앤디 버넘이 자신의 비전을 설명하는 방식을 이 개념으로 풀이했습니다. 버넘 총리가 내놓은 원대한 계획 대부분은 2030년 이후에야 효력을 발휘할 예정이며, 지지자들은 그 시간이 앞으로 필요할 인기 없는 조치에 사회가 적응하는 기간이 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기업 현장에서 이 전략은 취임 초기의 높은 기대와 이른바 '허니문 기간'을 누리면서도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 앞에 놓여 있음을 아는 신임 리더에게 유용한 수단입니다. 다만 신문은 전략을 구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끝까지 완수하는 뛰어난 실행력과 때로는 약간의 운이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씨티그룹(Citigroup)의 제인 프레이저(Jane Fraser) 최고경영자가 꼽혔습니다. 그는 2021년 몸집이 방대하고 실적이 부진한 데다, 단기적 고통을 수반할 어려운 결정을 미뤄 온 은행을 넘겨받았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수만 명 규모의 인력 감축을 거친 현재, 씨티그룹의 최근 수익성 목표는 업계 기준으로 여전히 겸손한 수준이나 주가 수익률은 대부분의 경쟁사를 앞질렀다고 신문은 평가했습니다.

이 전략의 기술은 현실 직시를 유지하되 지나치게 어두워지지 않는 데 있다는 지적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경고의 수위가 너무 높으면 조직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 임기 첫 몇 달이 그러했다고 신문은 설명했습니다. 반면 보잉(Boeing)의 켈리 오트버그(Kelly Ortberg) 사장은 2024년 위기에 빠진 항공기 제조업체를 맡으면서 '힘든 결정'과 '구조적 변화'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는 동시에, 회사가 다시 업계의 선도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냉정한 진단과 희망의 제시를 함께 내놓은 균형 잡힌 소통이었던 셈입니다.

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교훈은 석유 메이저 BP의 사례가 보여 줍니다. 전 최고경영자 버나드 루니(Bernard Looney)가 BP를 재생에너지 기업으로 전환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발표하고 배당금을 삭감하자 주가는 급등했습니다. 그러나 친환경 사업은 거의 진전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루니는 부적절한 행위를 이유로 2025년까지 해임되었고, 후임자는 그의 전략 전체를 철회했습니다.

신문은 여기에 또 하나의 경고를 덧붙였습니다. BP는 스스로 실책을 범했을 뿐 아니라 거시 환경의 인질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석유 친화적 의제를 들고 백악관에 복귀하면서 에너지 시장의 셈법이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밑작업을 아무리 잘해 두어도 다져 놓은 경기장이 한순간에 짓밟힐 수 있으며, 진정 위대한 리더는 그런 상황에서도 경기를 이어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신문의 결론입니다.

이 대목에서 시니어 독자 여러분께 몇 가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평생을 조직에서 일하며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 오신 분들이라면, 개혁에는 명분만큼이나 시간과 신뢰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변화를 서두르는 것이 늘 능사는 아니며, 구성원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개혁은 아무리 옳아도 반발만 부르기 쉽습니다. 그런 면에서 밑작업을 중시하는 접근은 점진적이고 책임 있는 변화를 선호하는 보수적 시각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지혜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밑작업이 실행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보수의 미덕은 말보다 책임에 있습니다. 약속한 개혁을 끝내 이행하지 못한다면 그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취임 초기의 후한 평가를 누리는 동안 어려운 결정을 실제로 내려 두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프레이저 사례에 대한 평가는 아직 중간 성적표에 가깝고, 한 기업의 성공이 모든 조직에 통하는 공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상황과 조직의 체력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운이라는 변수를 겸허히 인정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해도 통제할 수 없는 환경 변화는 찾아옵니다. 그렇기에 훌륭한 리더는 계획이 틀어졌을 때 무너지지 않고 방향을 수정하며 경기를 계속하는 유연함을 갖춘 사람입니다. 이는 리더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퇴 이후의 삶을 설계하는 시니어 여러분께도 철저한 준비와 단호한 실천, 그리고 예기치 못한 변수 앞에서의 유연함은 똑같이 소중한 덕목입니다.

개혁은 선언이 아니라 꾸준한 실천으로 완성됩니다. 밑작업으로 시작하고 실행으로 증명하며 변수 앞에서 유연함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진정한 리더십일 것입니다.

에피소드: 김형래 편집장의 '아침마다 지혜'

Podli무료 Podli 앱 받기
↓ App